| 문상문 사모 양력 Mrs. Sang Moon Lee's Bio |
| 문상문 양력 조카 박도수 글 중에서 2011년 7월 우리가 1945년 해방한 다음해인 1946년 한국에 돌아왔을 때 外家 (외가집)는 慶尙南道 河東郡 北川面 稷田里(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에 居住(거주;살다) 하셨는데 姨母(이모)님은 그 당시 고향인 북천면에 안 계시고 釜山(부산) 地方(지방)에 나가 계셨으리라 생각된다. 작은 외숙, 文永伯(문영백)은 釜山 일본사람 布木店(포목점)에 養子(양자) 로 계시다가 解放後(해방후) 養父母(양부모)와 渡日(도일). “10년 있다가 돌아오신다고 하셨는데 그 후 消息(소식)이 끊어짐. 姨母(이모)님 한자 이름이 “ 文祥文(문상문) ”인줄 알고 있었는데 … 除籍 謄本(제적등본)에는 “尙文(상문)”으로 돼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永智(영지) 外叔(외숙,외삼촌)님은 조용하시고, 신사(Gentleman), 學者 (학자) Style로 조용하시고 손재주가 띠어나셨다. 하동에 게실 때 木花 (목화)를 자아서 실을 뽑는 물레를 만들러 놓으신 것을 본적이 있다. 그 당시 재료는 집 근처에서 자란 대나무와 소나무 가지와 공구는 시골에서 쓰는 낫과 톱 정도인데 그 뒤에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에 비해서 정말 작품이 훌륭했다. 둘 째 外叔(永伯)님은 우리가 해방해서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부산 일본인이 경영하는 큰 포목점에서 일하고 계시다가 포목점 주인이 일본 아미노(網野, 일본 京都府(경도부) 北(북)쪽) 지방으로 돌아 갈 때 같이 일본으로 가셨다는 소문 이였다. 永伯(영백) 외숙님이 10년 후에 돌아오신다고 하셨다는데 끝내 소식이 없다. … 나는 1950년 軍(군)에 입대해서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하고 있어서 이모님을 만날 기회가 없다가 … […] 이모님과 내가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 이모님이 경남 蔚山市 兵營이라는 곳에서 유치원 선생님으로 계시고 내가 아마 小學校 5, 6학년 때 우리가 “닛켈광”을 케는 鑛山村인 日本 京都府 與謝郡 與謝村 字 金屋(일본 말로; 교도후京都府 여자군 여자무라 아자 가나야)에 살았는데 어머니가 한국에 계신 이모님께 편지해라는 말씀을 듣고 편지를 몇 번인가 보낸 드렸다. 그 때 이모님이 일본어로 된 신약성서 몇 권을 보내주셔서 받아 읽어 본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그 책이 신약성서인 줄은 모르고 그저 보통 이야기 책 인줄만 알았다. 그 이전에는 이모님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 형제들은 몰랐고 우리에게 한국에 外家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해방해서 한국에 돌아와서 처음 北川面(북천면)에 사시는 외가를 방문해서 알게 되었다. 이모님은 가난한 외가 집일을 많이 걱정하셔서 객지에 생활하시면서 물 심 양면으로 어려운 생활소에서도 많이 도와 드리고 계셨다. 지금은 저 세상으로 간 起東(기동)(文 昌東 이의 兄) 이를, 아주 머리가 영리하고 활발한 장조카를 부산에서 공부 시키고 계셨고 출가 하신 이후도 외가집의 생활 사정이 안 좋아 이모님이 계속해서 힘이 되는 대로 도와 주셨다. 지금도 나와 외사촌; 창동, 혜자, 선자들과 전화 통화 할 때면 꼭 “미국에 계신 고모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이모님의 안부를 물어본다. 미국에서 이모님의 생활비도 넉넉하시지도 않으신데 가꿈 어렵게 사는 친정 조카들에게 100에서 200불 씩 송금을 하신 것으로 안다. 이모님은 우리 형제들이 어릴 때 항상 “공부 열심히 해라”는 말씀을 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우리 어머니는 이모님이 만일 남자 로 태워났더라면 크게 성공 했을 것인데 하는 말씀이 생각난다. 永伯(영백) 외숙님과 이모님은 형제 중에서도 정말 머리가 좋으신 분이였다. 그 당시는 생활 사정이 너무 힘들어서 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