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상동 목사 |
“주님의 사랑” * 이글은 한상동 목사의 옥중생활을 글로써 공개한 최초의 책(주님의 사랑, 부산: 성문사, 1954)이자 유일한 옥중기 자료로서 박윤선 목사가 옮겨 적었다. (밀양에서 한상동 목사-사진) 1.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까지 주께서 지금도 저와 같이 계심을 믿어서 알고(마28:20) 찬양을 받으실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이 글을 쓰게 됨을 감사하는 바이다. 저는 나이 여섯 살 되던 해에 부모와 남녀 8형제나 되는 가족을 떠나, 10리 가량 떨어진 곳(다대포)에 있는 5촌 당숙의 집에 양자로 가서 어릴 때부터 고독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었다. 21세 때부터 인생문제로 고민을 하다가 견디지 못하여 자살까지도 생각해 보았으나 24세 되던 봄부터 주께서 불러 부산 다대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25세 때에 세례를 받고 신앙으로 살게 됨에 따라 핍박이 시작되었다. 우리 풍속은 특히 선조의 제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양자로 간 사람이니 만큼 본래 무자(無子)한 사람이 양자를 구함은 선조의 제사 문제가 중대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미리부터 예측한 바이었지만, 예측 그대로 양가(養家)에서 쫓겨났다. 쫓겨나왔다가 양가 부모의 감정이 좀 식어지면 다시 들어가고, 또 쫓겨났다가 또 들어가고 하여 약 3년간이나 쫓겨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중 별별 사건도 많았다. 그 중에 몇가지 예를 든다면, 양가 부친께서 주야 3일간이나 가슴을 치며 무자하심을 한탄하여 통곡하시는데, 이는 진정 쫓겨나옴을 당함보다 더 심한 고통이었다. 한 번은 문중회의(門中會議)가 열렸는데, 우리 동리는 전 인구가 약 800명 가량으로 그 중에 우리 일가인 한씨가 약 250명이며, 이 사람들 중에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 30-40명이 모여서 일가족을 위한 사건의 회의를 하고 내게는 파양선고(破養宣告)를 한 것이다. 그때 양모되신 어머님이 목을 매어 죽은 모양이라 대문 밖에서 들으니 온 식구들의 곡성이 진동하였다. 나는 들어갈 수가 없어 대문 밖에서 듣다가 이제는 멀리 도망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전도사를 찾아 방문하고 사연을 말한 후 도망하겠다 하였더니 오늘 밤은 전도사 댁에서 자고 내일 되어가는 형편을 보아서 어떻게 해라 하여 거기서 자고보니, 소식이 들리는데 별세하지는 아니하셨고 목을 맨 까닭으로 아직도 괴로와 하시는 모양이라 하며, 양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를 찾아 왔었다. 이는 양가에서 생각하기로 축출을 당한 자식이 자살이나 하지 않았나 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양가에 들어갔으나, 가정의 불평은 여전히 계속되어 3년이란 세월을 지난 27세 되던 9월 경에는 아주 축출을 당하였다(눅12 49-53). 그 당시 경남 진주읍 호주(濠洲)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에 교편을 들고 있었으나, 그때부터 전도의 사명을 느껴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 서울 피어선(皮魚善)고등 성경학교에 입학하였지만 만족을 얻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간절하여 마침 경남 여전도회 사업으로 전도인의 사명을 받아서 교회도 없고 신자도 없는 곳으로 전도하러 갔었다. 2. 전도와 목회 경남 고성군 학림리란 곳은 옛날 풍속의 예의에 너무 완고한 곳이라 부부간에도 내외를 하는 곳이었다. 옛날 풍속에 남자만 거처하는 사랑방이 있어 이 남자가 자기 부인 방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어 들어갈 때에는 뜰에서부터 기침을 하여 부인에게 들어갈 뜻을 알려주면, 그 부인은 주의하여 남자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기 전에 남자가 보이지 않는 다른 문을 열고 슬금 나갔다가 자기 남편이 방에 들어와서 볼일을 다 보고 나간 후에야, 부인은 다시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고래(古來)의 풍속을 그대로 지키는 동네였다. 또 한 가지 다른 남자와 서로 대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라 하여 남자가 길을 가다가 여자가 오면 옆으로 돌아서고 여자는 남자의 뒤로 지나가는 법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길을 가다가 남자를 만나면 좀 머뭇머뭇해 보아 남자가 돌아서지 않으면 이 남자는 하인이라 여기고 예의를 알지 못하는 하인은 내외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마주 보고 지나가 버린다. 이와같이 아직도 고풍스러운 예의를 지키는 곳에 처음으로 나선 나 자신으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고 하니 이 동리에 있어서 전도인에게는 가옥도 빌려 주기 않기로 하며, 동시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더불어 이야기하며 전도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냉수를 마시고 1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여도 여전히 전도는 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하기를 말만 지혜있게 잘해서 듣는 자로 하여금 답변할 수 없도록 하여 말로써 이기기만 하면 그사람들이 믿어 신자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하였다. 가정에서 쫓겨 나오기까지 한 나로서는 전도가 되지 아니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재산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왔거늘 왜 전도가 되지 않는가’ 하고 실망해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다른 전도지로 옮길 때에 나를 한 번만 더 전도인으로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전도회에 청원하였다. 전도회에서는 만 2년 내에 교회를 세우고 다른 전도지로 이전하는 것이다. 전도회에서는 이번에는 아주 불량자들이 많은 시골 장터인 경남 하동군 진교리로 가도록 허락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서 진정한 기도의 재미를 맛보았으며 경험을 얻었다. 밤 2시, 혹은 3시 늦으면 4시 경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숲 속에서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에 무슨 짐승이 나 오는 것 같아서 무서움으로 기도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성령으로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셔 주시마고 약속하신 말씀이 믿어졌다(마 28:20). 나는 바람 소리도,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도무지 육신의 감각이란 것을 모르고 오직 주님과 이야기 하기를 시작하면 그 시간이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동안 괴로운 줄도 모르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기도할 수 있게 되어, 그 기도하는 시간이 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이 되어졌다. 전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이 오고 나가는 것과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렇게 기도의 재미를 본 나는 일 외계로부터 오는 모든 것에 감각이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향하여 기도하는 데만 정신이 집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도가 되고 안됨을 나는 하등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여 진실한 신자가 차차 많아졌다. 이는 정녕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 확실하였다. 그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두 학기 앞두고 앞으로 교회로 나가 섬김에, 어찌하며 또한 어찌될까 함이 나에게는 큰 문제가 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갈 때에 2,3년간은 아무 염려가 없도록 설교 준비가 되어 교회로 나가는데, 나는 설교 하나 준비없이 그대로인지라 할 수 없이 두 학기를 앞두고 새벽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토요일이 되면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 교회에 조사(助師)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 있어서 신학교를 졸업하여 목사로 가지 않고 조사로 가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사로 간 것 만큼 그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감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2개월 가량 지난 후에 그들이 자복하며 말하기를 “한 조사님은 옛날의 한 조사님이 아니고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 생각하여도 설교나 기도에 있어서 전과는 다름을 느끼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크게 은혜를 받아 교회가 부흥되는데 새벽마다 은혜를 받으니, 형편상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은 늘 탄식하여 마지 않았다. 나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1년 중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기도회는 계속하였는데, 주께서 성령으로 친히 일하심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 후 나는 경남 마산에 있는 문창 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내가 가기 전에 그 교회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어떤 장로님이 사람을 내게 보내어 하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 공동 의회를 열어 가결이 되어 목사로 청하였으나 사실은 모든 청년들과 기타 유력한 직분자들 중에서는 환영하지 않으니 우리 교회로 오지 않는 것이 좋겠읍니다. 만일 우리 교회에 왔다가 배척을 당하면 교역 첫걸음이 되는 일 만큼 한 목사의 앞길이 막힐까 합니다. 또 우리 노회에서도 어떤 목사는 아직도 경험도 없고 유치한 사람이니 문창 교회 시무는 합당하지 않다고도 하는 등 의논이 많았읍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문창 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전지 전능하신 주께서 어떻게 하여서라도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만일 문창 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오면 내가 그 교회에 가서 배척을 당하여 쫓겨나며, 동시에 교역할 길이 막혀 세상 교회에서 버림을 당할지라도 이 희생을 달게 받겠나이다. 아버지여! 이 종의 희생을 돌아보지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 의외에도 나를 오지 말라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말하던 장로님이 친히 와서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고, 꼭 우리 교회로 와야 될 것을 역설하며 또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노회에서 문창 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이줄 알고 문창 교회 목사로 갔었다. 의외에도 첫 시간부터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 두 달이 지나메 청년들이 자복하며 ‘자기들이 목사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에 조사일 때보다도 지금 한 목사는 주님과 같이하는 생활을 매일매일 힘쓰고 있으며, 주님께서 같이하셔서 내 모든 것을 주장하심을 알지 못하고, 한 목사인 사람만을 보는 청년들의 하는 말인 것이다.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