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동 목사
With Chungsoo, the youngest son, a freshman at Wheaton College, 1978

    한상동 목사 옥중기 (계속)

    “주님의 사랑” * 이글은 한상동 목사의 옥중생활을 글로써 공개한 최초의 책(주님의 사랑, 부산: 성문사,
    1954)이자 유일한 옥중기 자료로서 박윤선 목사가 옮겨 적었다.


    3. 환난의 시작

    수년 전부터 일본 국가가 강요하던 신사참배 문제로 직접 교회와 마산 경찰서에서 마찰이 시작되었다. 지방
    시골 교회에서 오는 조사님들의 말을 들으면 신사참배 하지 않는 자는 죽지 않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조사님을 꿇어 앉혀 놓고 다리 사이에 큰 몽둥이를 넣어 한
    시간 이상이나 있다가 그도 부족하여 순사 2명이 그 양단(兩端) 위에 올라 앉아 다리 뼈가 으스러지는지,
    어찌되는지 감각이 없고 걸음도 못 걸을 지경에 이르게 한 후 집으로 보냈는데 치료한 후 겨우 불구자는
    면하였다고 한다.

    나의 고민은 차라리 죽어지면 오히려 다행이겠는데 만일 불구자가 되면 이 일을 어찌하나 함이었다. 이에
    나는 기도하기를 “오, 주여! 이 몸을 드리나이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불구자가 되어도 주님께 영광만
    된다면 나는 이로써 만족하겠나이다. 전지 전능하신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데
    하루는 마산 경찰서에서 마산 시내에 있는 각 교회 제직 전부를 불러 좌담회를 한다고 하였다. 우리
    당회에서도 각 직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경찰서장 이하 서원 전부와 시내 중등학교 교장(일본 사람)들도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경찰서장 간단히 취지 설명을 한 후 마산 중학교 교장이 미리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여 가지고
    와서 신사참배를 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일장(一場) 연설을 하였다. 그 때 연설이 끝나자 서장이 나에게
    신사참배의 가부를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들어갈 때부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심이
    믿어졌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교장이나 서장이 말한 것에 대하여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힘있게 증거하였다. 이렇게 힘있게 증거하게 된 것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 믿어졌던 까닭이었다. 그 자리에 낮았던 우리 믿는 형제들이 다 크게 두려워 한 것은 한 목사가
    너무도 강하게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은즉 오늘 한 목사는 크게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짐작하였던 까닭이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나를 동정해 마지 않았으며 한편 서원들은 서장의 명령 한 마디에 나를 검속할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장의 태도는 의외에도 나를 주목하여 보다가 서원들을 보면서 검속하지 말라는 뜻으로
    도리질을 하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아-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은 진실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무사히 나왔는데 같이 갔던 우리 형제들은 그 되어진 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다.

    그후 마산 경찰서에서는 매일 나 혼자 불러서 갖은 곤난을 주었다. 그러는 중에 한가지 증거하고자 함은
    신사참배를 못할 이유를 기록하여 달라고 하며 만일 그 신사참배 못할 이유가 합당치 못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위협한 것이다. 나는 기도하였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법관 앞에 설 때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말할 것을 주리라 하신 주님이시여! 이제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순간에 여섯 대지(大旨)로 신사참배 못할 이유가 환하게 알아지는데 그대로 기록하여 주었더니 서장이
    나보고 “너 같으면 신사참배 못하겠다 나가라!”고 말하였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같이 계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점점 형세가 흉악하여 마침내 나는 문창 교회에 시무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못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문창 교회에 있으므로 나 자신의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그 보다도 온 교회 교인들에게 갖은 고난을 주게 되는 것이었다. 혹 어떤 교우
    중에서는 한 목사가 사임하였으면 좋겠다는 이도 있었다. 이는 교우들이 너무 괴로움을 당하는 까닭이었다.



    4. 신사참배 반대 운동

    떠나기 어려운 나 자신! 보내기 싫은 문창 교회 형제들 아- 가슴에 뭉친 한없는 한탄에서 말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잊기 어려운 것이었다.

    나는 부산으로 나와 일년이란 세월을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였다. 이에 대한
    방법은 신사참배하는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는 교인으로 하여금 출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며, 신사참배한
    목사나 교인들에게는 인사도 아니하며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함을 교우들에게 보여주니,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참석하지 아니하며 신사참배한 사람과는 인사도 아니하고,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는 교인이
    차차 많게 되어 마침내 전국적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어느 주일 날 예배하는 순서에 따라
    찬송도 하며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며 설교도 하여 모든 순서가 끝나고 마지막 축복 기도도 하여야겠는데
    앞에 교인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두손을 들어 우리 강산 교회를 향하여 축복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국교회가 장차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뻐하였다. 그 후 1939년 여름이었다. 부산 근처인 수영
    해수욕장에서 몇 사람의 동지가 모여 수양하면서 기도하였다. 이 때가 우리 한국 교회 재건의 시작이었다.
    그때부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기도하던 중 한국 교회를 위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음을 깊이 느낀 것이다.

    이 수양회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는 문창 교회 김 두석(金斗石)이라는 여학교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이 되니 어떻게 해결할 방침이 없을까 함이었다. 나는 즉시
    마산으로 가서 만나 보았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못하였다. 여학교 선생으로 처녀인데 이 여선생의 받는
    월급으로 늙은 어머니와 홀로 있는 오빠, 이 세 식구가 그날그날 생활하여 가는 것이다.

    만일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으로 있을 수 없으니 3식구의 생활은 물론이고, 신사참배를 하려니
    신앙 양심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참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선생으로 봉직하려니 남자도 견디지
    못하는 일을 처녀의 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 예수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세 식구를 향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시겠읍니까?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학교 선생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읍니다”고 말이 떨어지자 늙으신 모친은 “나는 이대로 주림을
    당하여 죽을지언정 신사참배하고 받는 월급으로 먹고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김 두석 선생은
    쾌활하게 “나는 학교 일 보는 것 그만 두겠읍니다” 하며 이제 3식구의 생사 전부를 주님게 맡긴다는 기도로
    그 밤을 나하고 네 사람이 혹은 울며 혹은 기뻐하며 지냈다. 이는 목사인 나 역시 생활의 앞길이 막연하였다.

    그 후 김 두석 선생은 2년 동안 옥 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활로 전 한국 신도에게 무언의 설교가
    되었다. 동시에 그 오빠와 그 어머님, 아!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생활, 그 쓰라림의 사정을 누가 알 사람이
    있으리오.(김두석 선생은 1991년 현재 제주도에 생존) 1939년 10월 경이었다. 내가 밀양군 마신리란 작은
    시골 교회에 가서 2,3개월간 고요히 침묵하고 있을 때에 된 일 중에 한 가지를 증거하고자 한다. 이 작은
    시골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1주일 전에 세례를 베풀 것과 성찬을 먹을 광고를 하고 그 주일 안에
    세례 내용과 성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주일을 당하여,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는데 내 일생을 통하여
    기도하던 중 그 때와 같이 어려움을 당한 경험은 나 자신 외에는 알 자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 어떻다고
    말하여야 좋을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기도가 되어 지지를 않는다는 것인데, 기도만이 안 된다는 것보다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무서운 세력이라 해야할지 형언할 수 없는 일을 당한 나는 견디다 못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5일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서에서 목사, 장로, 집사, 제직 전부를 호출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산으로 간 후 교우들은 철야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 많은 은혜를 받아서 성례를 거행하는 것
    이상으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할 힘을 얻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제직 전부가 경찰서에 갔었다. 사건은 신사불참배한 일인데 나에게 신사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라 하기에 나는 산에서 기도하고 온 것 만큼 힘이 있었으므로 열심으로 신사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는
    중에 중지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행한 장로, 집사들에게 신사참배 가부를 물었으나 전부가 힘있게
    반대하였다. 이상하게도 경관들이 힘을 잃어 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오늘은 그만 두고 수일 후에 교회로
    가서 전 교인들 있는데서 신사참배에 대한 인식을 시킬 터이니 그리 알고 오늘은 다 돌아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무사히 돌아와 승리의 기도로 감사를 드리고 수일 후에 오겠다는 순사를 기다리면서 기도하였다.
    하루는 정복 혹은 사복 입은 순사 4명이 그 이웃 동네에 있는 경방대원(警防隊員)인 청년 3,4명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둘러싸며 시위를 했다. 시골사람들은 큰 야단이 난 것처럼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당장에 없어지는 것같이 구경을 했다. 목사인 나에게 한 시간 이상이나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로를 불러서 말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니 “전에 한 목사가 오기 전에는
    어찌하여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전에는 너무 강제로 위협함에 부득이하여
    하겠다고 하였지만 이제는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순사들은 목사와 장로에게는 실패한 줄 알고
    교인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여 인식을 시키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순사들이 돌아가면서 “내일 아침에 목사와 장로는 경찰서로 오라”하고 가더니 이튼날 아침 일직 와서
    하는 말이 “한 목사 오늘 어디로 갈 일이 없느냐”고 묻기에 그때 미리부터 부산에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산 갈 일이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순사들은 말하되 “그러면 부산으로 가라, 그리고 한
    목사가 경찰서에 오지 않으니가 장로도 경찰서에 올 것 없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아! 진실로 우리와
    같이 계셔주시는 주님은 어찌 이렇게도 권능을 베푸시는지! 성찬을 베풀려던 그 주일날에 기어이 산으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시고 온 교회로 하여금 또한 기도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받은 은혜로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니, 과거 기독교 역사 중 목사가 성찬을 베풀기로 준비한 주일에 교회를 비워두고 산으로
    도피하였다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정신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지내고 보니 어찌 그리 하였던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는 참으로 찬송한다.

    1939년 12월 경이었다. 경찰서에서 다시금 우리 교회 제직 전부를 호출하여 목사 장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2주일인 15일을 지나, 이 목사와 장로는 경찰의 수단과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자기들의
    낙망에서인지는 모르나 우리들을 출옥시켰다. 그리하여 일반신자들은 우리를 의심하였다. 신사참배하기로
    허락하지 않고는 결단코 2주일만에 출옥할 수 없다 하여 우리를 불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었던 밀양 경찰서 서원이 이를 증명하였다. 검속당한 지 2주일만이었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불러
    인식을 시켜 보려고 할 때에 나는 기도하기를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내 연약함을 아시오니 이때에
    주님께서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하며 나는 전심으로 주님께로 향하였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주목하여 보더니 하는 말이“신사참배를 못하겠다 하니 만일 앞으로 다른 법에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하며 고등계 주임을 보고 출옥시키라는 것이었다. 장로님을
    모시고 우리는 출옥하여 우리 교회를 향하여 돌아오는 도중에서 온 교우들이 나와 우리를 영접하여 주었다.
    그 중에 한 젊은 여성도가 나에게 묻기를 “목사님 어떻게 되었읍니까?” 했다. 이는 ‘신사참배하기로
    허락하고 출옥하십니까?’라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나는 “주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요,
    주님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권능을 얻으리라”고 대답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검속되었다가 2주일만에
    무사히 출옥됨은 전국에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신자들이 우리를 의심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9년 12월
    경이었다. 이 인재 형님이 평양 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가 개학을 못하니 평양
    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교수를 받고 있었다. 이때 어떤 청년이 와서 돈 4백원을 주면서
    말하기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사용해주기를 바란다고 하기로 그 돈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상의하는
    것이었다. 이 인재 형님은 부산 근처의 수영 해수욕장에서 같이 수양하며 기도하던 분이요, 신사참배
    운동을 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 자유를 부르짖으며 한국 교회의 부흥 운동을 하리라는 나의 중심을 아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이 인재 형과 같이 경남 각 지방 순회하며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각자 개인 신앙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실행할 조목은1. 신사참배 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 (이는 신사참배하는 목사가 그 교인을
    인솔하여 가지고 수시로 신사참배하러 가기 때문이다) 2.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3.
    신사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아니할 것.(우리 개인 신앙 부흥 운동하는 일에 연보하여
    도와주기 위한 까닭이다.4. 교회 출석 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드릴 것......
    등. 경남에 있어 분담하여 일할 구역은 부산 지방, 마산 지방, 진주 지방, 거창 지방, 통영 지방의 5구역으로
    하여 각각 책임자를 세워 맡겼다. 그리고 서울, 평양으로 내왕하며 북한에도 신사참배 반대를 하며 개인
    신앙 부흥 운동과 함께 연락을 취하였다. 이렇게 운동하며 다니던 중 가는 곳마다 모든 신도들이 크게
    환영하여 주었다.

    신사참배한 목사들 중에도 이 운동에 가입하는 목사도 있었고, 가입하지 아니하는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배척을 당할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 중에 한 가지 내가 담대하여 진 것은, 어느날 나는 마산에 있는 김
    두석 여자 선생 집에서 자고 새벽 여섯시 경이나 되었을 때에 의외에 마산 경찰서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와서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이 집에 없던 손님이 오지 아니 하였느냐?”고 묻는다. 나는 경찰서 고등계에서
    와 묻는 줄 알았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니 무엇이 두려우리요? 나는 곧 나서면서 “예 제가 왔읍니다”
    “한 목사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답을 하엿다. 물론 이 형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한 목사가 김 두석
    선생 댁에 와서 자고 있는 줄 알고 찾아온 것이었다. 문답은 다시 계속 되었다. “한 목사 요사이 무엇
    하느라고 이곳 저곳 다니느냐?”고 한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하러 다니노라. 그리고 이 반대 운동은 결단코
    비밀로 하지 아니하겠노라. 왜 그런고 하니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다 하여 놓을지라도 또다시 당신들이
    경찰의 힘으로 탄압을 할터이니 우리들의 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합법적으로
    정부가 양해되도록 할 터이니 안심하시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잘 되느냐?” “물론 잘 됩니다.” 신자로서
    누가 있는가 하였다.

    나는 물론 금명일 간에 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후 2,3개월이 되도록 검속하지
    아니하였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신다.


                                                                                         계속